보.고.싶.다 동춘서커스 -안산 대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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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조차 변변히 없던 1960년대,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유랑하며

팍팍한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고 울고 웃게 해주었던 <동춘서커스>를 기억하는가.

1925년 일본 서커스단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박동수(호 동춘)가 창단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커스단이었던 동춘서커스는

영화배우 허장강, 장항선 코미디언 서영춘 이주일 등 수많은 스타를 배출하고

한때 250여명이 넘는 단원들을 이끌고 전국을 순회할 정도로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지만

아쉽게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추억의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2015년 대부도 끝자락에서

여전히 강인한 생명력으로 우리 곁을 지키고 있는

<동춘서커스>를 다시 만났다.

 

길 위의 곡예인생 2- 돌아온 동춘서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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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북동 1849-31. 거대한 천막 주변으로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아이부터 백발의 노인까지 연령층도 다양하다. 옛 향수를 느끼게 하는 천막 안은 공연열기로 후끈하다. 곡예사들이 맨손으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묘기들을 선보일 때마다 관객들의 긴장과 탄성이 이어진다. 4년 전 유랑의 길을 접고 대부도에 둥지를 튼 <동춘서커스>.

세월 따라 사람이 변하듯 올해 90살이 된 동춘서커스도 많은 것이 달라졌다. 곡예는 물론, 광대와 동물, 가수까지 출연하던 종합예술극단이었던 동춘서커스는 음향과 무대예술, 환상적인 퍼포먼스가 결합된 초대형 아트 서커스로 변신 중이다. 옛 모습은 사라졌지만 천막 안에서 펼쳐지는 그때 그 시절의 향수와 추억은 동춘서커스 만의 변치 않는 매력이다.


서커스는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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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 안에서 누구보다 발 빠르게 관객들을 안내하는 남자. 48년째 서커스단으로 출근하는 박세환 단장이다. 그는 한국 서커스 역사의 산증인이자 파수꾼이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 20개가 넘는 서커스단이 있을 정도로 전성기였던 시절. 박세환 단장도 처음 서커스세계에 발을 디뎠다. TV의 등장과 사스 그리고 세월호 사건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존폐의 기로에 서기도 했지만 그는 기어코 동춘서커스를 지켜냈다. 경비를 아끼기 위해 집을 사무실로 쓰고, 한때 빚더미에 앉으면서도 그가 동춘서커스를 버리지 못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데.

 

 

쇼는 계속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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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기획에서 홍보, 때로는 매표에 잡일까지 무대 뒤에서 동분서주하는 또 한사람. 박세환 단장을 도와 서커스단을 이끌어가고 있는 김현우 팀장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동춘서커스를 떠날 때 태양의 서커스에 한눈에 반해 자청해서 입단했다는데. 그저 서커스가 좋아 잘나가던 직장도 버리고 청소 같은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는 그. 팀장이 된 지금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다양한 잡일을 도맡고 있지만 언젠가 동춘이 세계적인 서커스단이 될 거라는 꿈이 있어 고생스럽지 않다.

1980년대 서커스의 인기하락과 함께 한국인 곡예사들도 하나둘 서커스단을 떠나고 지금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건 중국 기예단의 곡예사들이다. 14년 전부터 동춘서커스 단원으로 활동해온 형강두 씨는 40여명의 곡예사들을 지휘하는 기술팀장이다. 보통 7-8살부터 곡예를 시작한 이들은 맨몸으로 아찔한 서커스 무대를 선보인다. 몸이 굳을 수 있어 무대에 오르지 않는 날 단 하루도 연습을 멈출 수 없다. 매순간 사고의 위험과 부상이 따르는 일이지만 이들은 타국 땅에서 동춘서커스를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무대에 선다.

평일은 2, 주말은 하루 3회 공연을 하는데 특히 주말공연은 객석이 꽉 찰 정도로 인기다.

720일 밤 115분 로드다큐 만남에선 이 시대의 마지막 서커스단 <동춘서커스>의 눈을 뗄 수 없는 화려한 무대가 잠 못 드는 여름밤, 특별한 선물을 선사한다.

 

7월 20일 밤 115, 89회 로드다큐 만남

<보.고.싶.다 동춘서커스> 편이 방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