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영동 황학산 깊은 골짜기 새막골,
황삭산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호두나무로 둘러싸인 낡은 집을 지키는 조분순(67) 씨가 있다. 


8년 전 남편이 세상을 뜬 후 혼자 살아오고 있지만
분순씨는 별로 외롭지 않단다. 

산에 오르면 버섯들에게 예쁘다~ 귀엽다~ 인사해주고,
땅콩 호두 고구마 옥수수 등 올 가을을 풍성하게 장식하는 
할매의 공든 농작물들에게도 칭찬이 철철 넘치곤 한다.

그 뿐인가, 얼마 전 새끼를 낳아 7마리나 되는
고양이 가족들도 할머니의 곁을 지켜준다고.
옥수수 한 줄을 먹어도 그 속에 숨은 하모니카를 찾아내
박자 맞추며 신나는 놀이에 푹 빠지고 
노래가 흐르면 덩실 덩실 춤 출줄 아는 여자,
혼자 사는 즐거움을 제대로 여자 분순씨.

큰아들이 사업을 하느라 진 빚을 갚기 위해
남들은 은퇴하고도 남았을 나이에도
손톱이 빠지도록 일하고 또 일하는 
무적의 농사꾼 분순씨를 만나보자.

방 송 : 2013년 10월 22일(화) 밤 11시05분

#1. 황학산 가장 높은 집을 지키는 억척 할매


그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혼자 사는 생활이지만 조분순씨의 하루는 바쁘기만 하다.
황학산 산자락 깊은 새막골이 모두 분순씨의 땅인데다가, 심어진 호두나무가 수십그루에

산을 깎고 밭을 매서 직접 만든 수천 평의 농지에 심은 고구마, 땅콩, 고추, 깨, 옥수수, 콩 등

셀 수 없이 많은 농작물들이 동시에 수확기를 맞았다.

 

저마다 여름 햇볕 듬뿍 받아 무럭 무럭 자라준 농작물들이 마치 새끼처럼 예쁘고 고맙다는

분순씨의 얼굴이 고된 농사일에도 환하게 빛난다.

이렇게나 큰 규모의 농사를 혼자 짓다 보니 할매는 심심할 틈이 없다. 
오늘은 할매의 주종목! 호두를 주으러 다니는 날이다.

 

이미 몇 번 털고 난 호두나무 아래에는 알이 꽉찬 호두가 떨어져 있는데,

다람쥐가 와서 먹고 간 호두알을 제외하곤 꼼꼼히 주워 모아 깨끗이 씻어 말려 그냥 팔기도 하고,

깨서 알만 팔기도 하고, 귀하다는 호두 기름을 짜서 팔기도 한다니 일손이 보통 많이 가는 것이 아니다.

 

그 와중에 굵고 실한 호두알만 모아 밭에 옮겨 심는 이유는 무얼까 했더니,

할매의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들을 위한 호두나무를 물려주기 위함이라는 것.

가족을 생각하면 힘이 나는 대한민국 대표 엄마분순씨다.

#2. 반가운 아들이 오는 날

반가운 전화가 울리고 구미에 사는 둘째 아들이 토요일에 온다는 소식이다.

이렇게 일이 많은 수확 철에는 거의 매주 방문하여 어머니의 일손을 돕는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흐릿하던 하늘이 결국 빗방울을 쏟아내고 말아 버려 못 하는 일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손을 놓을 리 없는 억척 할매 분순씨는 비닐 하우스에 들어가 깨를 털고, 호두를 까고,

그러면서도 할 일을 만들어 낸다.

 

아들 박창길(46)씨는 그동안 어머니가 벌에 쏘일까 걱정되어 호두나무의 벌집을 제거해준다.

듬직한 어깨를 가진 아들은 언제나 어머니의 자랑거리가 된다.
평소 반찬으로 풋고추와 된장국만을 놓고 단출한 식사를 하던 분순씨의 식탁도 아들이 오니 풍성해졌다.

아들들이 좋아하는 버섯을 듬뿍 따다가 귀한 호두 기름을 넣어 만든 국에 틈틈히 캐놓은 산나물들도 무쳐 내고,

광에 가득 들어 있는 감자도 볶고, 모처럼 기름기 도는 식사를 하는 두 사람.

 

아들은 언제든지 어머니를 모시고 싶은 마음 뿐인데, 어머니는 그래도 이곳이 좋단다.

사실 어찌 이 곳이 좋기만 할까. 아직 큰아들이 만들어 놓은 빚도 남아 있기도 한 것이 이유이기도 하리라.

하지만 내색 않고 이 곳이 편하고 좋다고 말하는 분순씨다. 

 강한 척 괜찮은 척했지만, 아들이 떠난 후 쓸쓸함을 이기지 못한 분순씨가 결국 몸져 누웠다.

하지만 평소 이럴 때를 대비해 쌓아둔 약이 많아서 괜찮다고 말하는 그녀,

대체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지 손톱이 일년에도 몇 번이나 빠졌다가 다시 난 흔적도 있는 그녀의 까만 손끝에 눈길이 간다.

#3. 그래도 이 산에 살으리랏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어느 새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난 분순씨가 이번엔

또 오래된 라디오를 지게에 짊어지고 밖으로 나왔다. 뉴스를 들으며 집 근처 고구마 밭과 땅콩 밭에서

굵직한 고구마와 땅콩을 수확한다. 이렇게나마 가끔 세상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단다.
그러더니 올해 유난히 크고 실하게 잘 커준 고구마를 들고 어디론가 가는 분순씨.

바로 고구마 밭 바로 옆에 자리한 남편에게 올해의 수확물을 보여주기로 한 것.

50년전,  산골의 가난한 시댁으로 시집와 난생 처음 하는 고생에 힘겨워하던 부산 처녀는

어느 새 일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다. 지난 시간을 떠올리니 남편이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커져버린 걸 보면, 함께한 세월이 무섭기는 무섭다.
남편이 떠나고 혼자 남아 이 땅을 지키고 살아가는 억척할매 분순씨.

그녀가 있어  새막골엔 오늘도 햇빛이 비친다.